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뮌헨 협정 (문단 편집) === 1938년 9월 ===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Hitler_Chamberlain_Munich.jpg|width=100%]]}}} || || [[1938년]] [[9월 15일]] [[뮌헨]]에 도착하여 [[슈츠슈타펠]]의 사열을 받는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와 영국 측 인사들. 가운데 있는 남자는 당시 독일 외무부 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다. || 그러다가 위기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9월 13일 [[계엄령]]이 선포되고 주데텐란트의 독일인들이 집단 봉기했으나 하루 만에 진압되었다. 히틀러는 [[오스터 음모사건|군부의 절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지시했다.[* 독일의 전쟁 준비는 당시는 물론이거니와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날 당시까지도 제대로 완료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육군참모총장]]이었던 [[루트비히 베크]]는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반대하다가 사임하기까지 했다.] 프랑스는 예비군 동원을 검토하기 시작했고, 영국군 또한 일제히 비상이 걸렸다. 이미 앞서서 프랑스는 [[독일 국방군|독일군]]이 체코슬로바키아 국경을 한 발자국이라도 넘을 경우 즉각 개입할 것임을 천명한 바 있었다. 전쟁이 터졌을 때 참전하겠다는 입장은 주데텐란트 위기가 터진 이래로 프랑스가 고수했던 입장이었다. 만약 프랑스가 체코 슬로바키아를 포기할 경우 지금까지 체결되었던 프랑스와 중부 유럽 국가들 간의 조약들은 사실상 의미를 상실하여 휴지 조각으로 전락하는데 이 경우 프랑스의 보호를 기대할 수 없는 이 국가들이 자연히 근접한 강대국, 즉 독일과 이탈리아에 붙을 것이며 그러면 프랑스는 서구 유럽에서의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역으로 고립당하게 된다. 따라서 프랑스로서는 참전 이외의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문제는 영국의 참전 여부였는데 당시 독일의 전쟁 준비가 완료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던 프랑스에게 있어서 독일과 1:1로 전쟁을 벌이는 것은 그야말로 최악의 수였고 여기에 이탈리아도 독일 측으로 기울어 버린 상황이라 전쟁이 발발할 시 제2전선을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앞선 3월에 프랑스 정부가 영국의 입장을 확인하려고 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영국은 영국대로 이 사정을 잘 알고 있었지만 전통적인 [[육군]] 강국 프랑스와는 달리 즉시 투입할 수 있는 육군력도 없었고 한창 재군비를 하는 중이었으므로 당장은 전쟁을 피하고자 했다. 로카르노 조약 상으로도 참전 의무가 있었던 것은 프랑스 뿐이고 영국은 그럴 의무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참전을 안 하자니 당장 영불동맹이 붕괴하고 프랑스가 패배하여 유럽의 균형이 무너질 것이 불보듯 뻔했다. 이 난처한 상황 속에서 영국이 참전도 안 하고 프랑스와의 동맹도 유지하는 길이 있었으니, 바로 '''히틀러가 침공을 안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자면 체코슬로바키아와 독일을 외교적으로 잘 다독일 필요가 있었는데 당시 독일이 들고 나온 구실이 바로 민족자결주의이고 주데텐란트에서 실제로 폭력 소요가 발생한 것 자체도 일단은 사실이라 명분이 독일 쪽에 있다고 판단했다. 이런 이유로 영국은 체코슬로바키아에 동원령을 내리지 말라고 압력을 계속 넣었으며 한편으로는 수 차례 중재를 시도했다. 위기가 고조되던 9월 15일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가 전격적으로 [[뮌헨]]을 방문하여 히틀러와 회담을 가졌다. 히틀러는 독일 주민이 과반수인 지역의 할양을 요구했으며 체임벌린은 즉답을 하지 않고 영국으로 돌아가 9월 18일 프랑스의 양해를 구한 뒤 체코슬로바키아에게 독일계 지역을 포기하라고 압력을 넣기 시작했다. 대신 체코슬로바키아는 영국과 프랑스의 독립 보장을 받았다. 즉, 이제부터는 전쟁이 터지면 프랑스뿐 아니라 영국도 휘말리게 되는 것이다. 그 동안 책임을 독박 썼던 프랑스가 '''물귀신 작전'''을 편 것인데 이게 영국 입장에서는 엄청난 정책 전환이며 의미도 컸지만 '''막상 영토를 뺏기는 체코슬로바키아 입장에서는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었다.''' 이 시점에서 체코슬로바키아는 몇몇 영토의 할양을 고려하고는 있었으나 독일계 지역 전체의 할양은 생각도 않고 있었으므로 처음에는 완강하게 거절했다. 그러나 영국이 전쟁이 터져도 영국은 참전하지 않는다며 체코슬로바키아에 입장을 전하고 프랑스는 프랑스대로 영국이 참전하지 않으면 프랑스가 참전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식으로 얼렀다. 결국 9월 21일에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해당 영토를 포기하기로 결정했으며 이 책임을 지고 내각 전체가 사임했다. 그러나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9월 22일 체임벌린이 직접 히틀러를 찾아가 영국과 프랑스, 체코슬로바키아가 영토 포기에 동의한다며 앞서 15일 히틀러가 제시한 요구에 대한 답변을 전했는데 처음부터 [[녹색 상황|전쟁을 노렸던]]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가 정말로 독일계 지역을 포기해 버리자 이번에는 단계적으로가 아니라 즉각적이고 신속한 양도와 해당 지역을 독일군이 즉시 점령할 것, 그리고 체코슬로바키아와 영토 분쟁이 있었던 폴란드와 헝가리의 문제도 조정할 것 등 일부러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건을 제시했다. 사태가 이렇게 되니 이제는 정말로 전쟁을 피하기 어렵다고 본 영국과 프랑스는 23일 오후 체코슬로바키아의 동원령 선포에 동의했고 이를 접수한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당일 밤 10시 총동원령을 선포했다. 다음날인 24일에는 프랑스도 동원령을 선포했으며 9월 26일 히틀러가 대규모 군사행동을 예고하면서 유럽은 전쟁을 향해 치닫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와중에 영국과 프랑스는 어처구니없게도 앞서 배경 항목에서 이야기한 부담으로 인해 "전쟁이 벌어지면 어떻게 할 계획인가? 싸울 건가 아니면 발을 뺄 건가?"라는 내용으로 서로 의미 없는 논의를 주고 받으며 눈치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리고 9월 28일, 또 다른 열강 국가가 끼어들었다. [[이탈리아 왕국]]의 [[두체]] [[베니토 무솔리니]]가 각국에 자제를 촉구하며 중재를 할 용의가 있음을 선포했으며 히틀러가 이에 화답하고 영국과 프랑스가 동의하면서 뮌헨 회담이 개최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